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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류 글로벌기업 삼성의 핑계

카알바람 2012. 11. 19. 11:39

세계 일류 글로벌기업 삼성의 핑계

[기고] 삼성반도체 세 번째 다발성 경화증 피해자 이야기

 

그러니까 소정(가명)씨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반올림에 제보된 다발성 경화증 환자 중 가장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라 소개하면 좋을까. 아니면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 2003년 입사자라고 소개하면 맞을까. 무엇도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그녀에게 자신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다. 그녀는 “제 이야기요? 별 다를 건 없는데...”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별 다를 것 없었다. 집안이 가난해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똑똑한 여자아이이. 제 힘으로 등록금을 벌어 대학을 갔을 때는 몸에 병이 깊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흔히 다룬, 너무 많이 다루어져 당사자가 겪은 아픔 또한 뻔하게 된 그런 이야기였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제 이야기요?

“제 이야기요? 저는 그냥 못 살았고, 중학교 1학년 때 집이 망했고요. 그때부터 학비가 좀 밀렸고요. 교복 얻어 입고, 나중에는 선생님이 사정을 알고 장학금을 주셨어요. 고등학교는 전교 10등, 5등 이런 식으로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아 가게 됐고요. 문제집 같은 거는 선생님들이 교사용 문제집 주시고,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제가 이과를 나왔거든요. 이과 중에서는 저만 대학을 못 갔어요.”

모대학 생명공학과에 합격했으나, 부모님은 대학가는 것을 반대했다. 등록금도 없었다. 결국 입학 등록을 못 했다. 그러나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싫었던 그녀는 학비를 직접 벌어 대학에 가기로 했다.

“삼성 반도체에 추천제가 있다더라 해서, 아는 분이 추천해줘서 들어갔어요. 그때가 해서 170:1이었나, 경쟁률이 그랬어요.”

그녀는 악착같이 일했다. 등록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한다지만, 한 달에 5만원만 쓰면서 버텼다. 스무살이었다. 동기들 보면 옷도 사 입고 화장품도 사 바르고 싶었을 테지만, 그때마다 포기했던 대학을 생각했다. 여기서 배우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쳇바퀴를 돌 거야. 다들 그렇듯, 그녀는 더 잘 살고 싶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까지 학원 다니고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학교도 매번 걸어다니고. 운동화가 낡아도 못 사니까, 오래 신어서 밑창이 다 떨어지는 거예요. 비 오는 날이 싫었어요. 비 오면 운동화가 젖어서 냄새가 나잖아요. 그때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학교에서 소위 ‘논다고’하는 애들이 냄새가 나네 어쩌네 하고 싶어도 내가 공부를 잘하니까, 뭐라 못 하더라고요.”

공부를 좋아하기도 했다. 내가 본 소정 씨는 배우지 않는 상태를 잘 못 견뎌했다. 자기 발전에 대한 욕구가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몸이 한껏 약해진 지금, 영어 단어 몇 개 외웠더니 목 아래 발진이 생겼다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공부는커녕,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다발성 경화증 3번째 피해자 이소정

반올림이 삼성전자‧반도체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이들을 제보를 받기 시작한지 5년, 제보를 해온 다발성 경화증 환자는 소정 씨를 포함해 3명이다. 다발증 경화증은 신경 계통에 장애가 생기는 병이다. 눈, 팔, 다리, 뇌 어디든 장애가 올 수 있고, 계속적인 재발 또한 가능한 병이다.

처음에는 시신경으로, 그 다음에는 뇌, 이어 다리에 이상이 왔다.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걷긴 했는데, 다리로 병이 온 뒤로는 너무 막막하다고. 4년 전 갑자기 쓰러진 후, 그녀는 몸이 조금만 피로해도 통증과 실신을 번갈아 겪는다. 아픔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녀가 하는 생각은 또 재발이 오면 어떻게 하지? 이다.

첫 증세를 보인 것은 2005년 봄이었다. 퇴사를 하자마자 눈에 이상이 왔다. 자꾸 시력이 나빠졌다. 허리도 아프고, 몸이 군데군데 이상했다. 인근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 했다. 그렇게 몇 년을 검사만 받으며 보냈다. 그러던 2008년 여름, 다리와 팔에 힘이 빠졌다. 며칠 뒤 안면마비가 왔다. 응급실로 향했고, 그제야 병이 밝혀졌다. 다발성 경화증. 다소 생소한 이 질환은 병명을 밝혀내는 데만 몇 년이 걸리곤 했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도 모르고 열심히 일만 해

스무 살,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긴 지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2003년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들어간 곳은 삼성반도체 생산기술 개발라인. 개발라인이란 판매용 웨이퍼(반도체)를 만드는 공정이 아니라, 신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라인이다. 개발라인은 자체적으로 실험용 웨이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반도체 생산공정 대부분이 소규모로 들어와 있다.

소규모이기 때문에 대다수가 수동기계다. 수동 기계란 말 그대로 사람 손이 더 많이 가는 기계, 더 노후한 기계다. 그러니 자동설비보다 화학물질 접촉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실험이라는 특성상 여러 작업공정을 동시에 다루니, 접촉하는 화학물질 종류도 다양했다.

그녀가 주되게 일한 곳은 포토라인이었는데, 이곳은 반도체 공정 중에도 유독 유기용제 사용이 많다고 알려진 라인이다. 포토라인에서 일하며 소정 씨와 동료들은 PR(감광용액)을 하루 16병 정도 교체했다. 그런데 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삼성 반도체 공장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포토라인에서 사용되는 PR용액에서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되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밝혀놓은 소연 씨의 업무는 다음과 같다. 2003년 2월부터 2004년 초까지는 주업무로 CMP공정과 Clean 공정을 담당했고 보조업무로는 CVD와 Etching을 담당했다. 2004년 초부터 2005년 초 퇴사하기 전까지 주업무로 Photo 공정을 하였고 보조 업무로 전 공정 검사업무(SAM, SCOPE)를 하였다. 노출가능한 유해인자로 슬러리 용액(실리카, 암모니아수), 감광용액(PR, solvent-based polymer), 신나, 불화수소, 황산 등이 있었다.)

게다가 신기술을 위해 알려지지도 않은 각종 유기용제가 쓰였을 테다. 그러나 각각의 유기용제에 맞는 보호장구나 장치가 주어졌는지, 입사 1-2년차의 오퍼레이터(생산직 직원)가 알 수 있을 리 없다.
소정 씨의 몸은 그때부터 아팠다.

“1년 다녔나 제가 살이 굉장히 많이 빠졌고, 생리가 불순해졌어요. 헌혈이 된 적도 없었어요. 헌혈하러 가면 먼저 검사를 하잖아요. 그러면 헌혈이 안 되는 몸이라고, 2년 동안. 그러다 퇴사를 하니까 헌혈이 됐어요.”

하지만 신경쓰지 못했다. 그 시절, 사는 게 바빴다. 몸 몇 군데 아픈 것이 대수가 아니었다. 그녀는 돈을 모았다. 안 쓰고 안 사고 안 입고, 악착같이 모아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다.

“경영대로 들어왔다가 법대로 전과를 했는데. 새벽 6시에 학교에 가 가지고 도서관에 있다가 강의 들으러 가고. 제 전공 아니라도 듣고 싶은 강의는 청강하고. 수업 끝나면 도서관에서 9시까지 있고. 다른 과목은 성적이 잘 나왔는데 영어는 c+. 영어는 학원을 안 다니면 못 하는 거예요. 자존심이 상했죠. 호주에도 어학연수 6개월을 다녀왔어요.”

그러니까 그녀는 소원 성취 중이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했다. 응급실로 실려오기 전까지.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괜찮지가 않아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사람들한테 밝은 척하긴 하지만... 솔직히 괜찮지가 않아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 게다가 몸의 통증은 나날이 더해진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작업환경 등을 물었다. 간단한 질의응답이었지만, 이 또한 그녀에게는 무리한 일이었다. 그녀는 조금만 피곤해도 몸이 아팠다. 하다못해 날이 흐려도 통증이 왔다. 피곤해서 어떻게 하냐고 하니,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30분을 하든 1시간을 하든, 선생님들 가시고 나면 저는 혼절해요. 그러니 한번 할 때 많이 해두는 게 좋아요.”

몸의 통증으로 잠을 못 잔다는 그녀. 그 똑똑하고 강인했던 사람은 이제 병원 자리에 누워 아파 우는 것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성격인지라, 입원을 하고도 방송통신대를 등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리에 재발이 와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더는 그것마저 욕심낼 수 없었다.

“그만두었죠. 안 되는 걸 붙잡고 있어봤자 뭐 해요. 어차피 안 될 거 미련두지 말자. 최선을 다했을 때 아니다 싶으면 깨끗이 포기하는 거지요. 미련 없이 했으니까.”

늘 굳건한 정신을 유지하고 싶지만 투병 생활만 5년 째, 순간순간 약해진다.

“반은 희망이고 반은 절망인데... 여태까지 다 이겨낼 수 있을줄 알았는데,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인생에서 어려운 것을 많이 겪을수록 점점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아픈 이후로는 아닌 것 같아요.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도, 더 커지기만 하고 계속... 오네요.”

불과 며칠 전 소정 씨는 결국 우려하던, 재발을 겪었다. 경추에 재발이 왔다는데, 죽지 않아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했다. 이제는 몸이 24시간 내내 아프다. 그녀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하는 생각이 하나 더 늘었다. 과연 치료가 가능할까.

다발성 경화증에도 여러 증상이 있는데다가, 그녀는 특이한 증상을 보이는 편이라고 한다. 그것은 치료에 있어,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신경계통 치료가 유명하다는 대형 병원은 하루 병상 비용이 17만원이란다. 꿈꿀 수조차 없다. 작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도 하루하루가 부담이다. 그저 스테로이드제와 신경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만 먹을 뿐이다. 막막하다. 애를 써보지만, 병든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따라오던 돈 걱정을 그녀는 병든 몸이 된 지금도 놓을 수 없다.

핑계를 대는 그 누군가

소정 씨는 자신이 일을 하다가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날짜를 아무리 계산해 봐도, 그때 병이 시작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삼성과 근로복지공단 입장에서 그녀는 직업병을 인정할 수 없는 140명(삼성반도체에 일하다 병에 걸렸다고 반올림에 제보된 수) 중 하나일 뿐이다.

산재 여부를 판단하는 근로복지공단은 올해 4월, ‘고객님의 신청 상병에 대해 심의 결과 업무와 재해와의 인과관계를 불인정한 판정에 따라 부득이 요양급여청서를 불승인 하였습니다’라고 알려왔다. 그녀는 이를 인정치 못하고, 산재여부를 다시 가려달라며 재심사 신청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힘들었을 텐데 왜 그리 악착같이 대학에 가려했냐고. 왜 그렇게 포기도 않고 살아왔냐고. 그녀는 말했다.

“난 이런 상황이니까 이걸 못 해. 이건 할 수가 없어. 그런 핑계가 되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핑계를 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핑계를 대기 싫어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망가졌다. 병상에 누워 젊디젊은 인생을 망가트린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찾으니, 그곳에 글로벌 기업 반도체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 일류 글로벌 기업은 그녀가 싫어한다는 핑계를, 몇 년 째 반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