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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 왜 국정원 프락치가 되었나

카알바람 2013. 11. 28. 09:58

A씨, 왜 국정원 프락치가 되었나

최명규 기자 acrow@vop.co.kr
입력 2013-11-27 23:27:05l수정 2013-11-28 00:12:09
재판 출석하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음모로 구속 기소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재판이 열리는 21일 오전 경기도 수원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 이석기 의원 등이 탄 것으로 보이는 버스가 들어오고 있다.ⓒ양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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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음모' 사건의 핵심 증인 A씨, 그는 왜 국가정보원 프락치가 됐을까? 그의 주장대로 천안함 사건이 계기가 됐던 것일까? 아니면 동료에 대한 실망감이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을까? 혹은 국정원에 무언가 꼬투리를 잡혀 회유와 압박을 당했기 때문일까?

일단 지난 9월 2일 국회에 제출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요구서에는 "제보자(A씨)는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호전적 실체를 깨닫게 된 데다 'RO(Revolution Organization:혁명 조직)'의 맹목적인 북한 추종 행태에 실망한 나머지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각오로 수사기관에 제보한 것"이라고 A씨가 국정원에 협력한 이유가 적시돼 있다. A씨도 재판에서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쳤고, '자발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4차례에 걸친 공판 과정에서 A씨는 천안함이 북한에 의해 '폭침'됐다는 주장을 100% 신뢰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또 당시 천안함 사건 관련 정부의 발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고,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을 A씨는 인정했다. 그는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일부 우호적인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주체사상 공부는 사상의 자유 측면에서 억압돼선 안 된다는 취지로 증언했느냐'는 재판부의 질문에는 "공부 자체로 탄압받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라고 답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의 모친인 강반석의 말을 인용해 신문에 답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앞서 A씨가 내세운 협력 사유에는 빈틈이 생긴다. A씨 역시 또 다른 이유로 이 사건으로 구속된 이모씨가 과거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등 사람들에 대해 실망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A씨는 2009년 10월 자신의 상급 성원이라고 주장하는 이씨가 무상급식 관련 한나라당 당사 점거 투쟁을 제안해 당황스러웠다고 진술했다. 당시 A씨는 2008년 만취 폭행사건에 따른 집행유예 기간이라 실제 점거 투쟁에 들어갈 경우 구속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20년 넘게 활동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맞나 해서 많이 괴로웠다"고 당시 느꼈던 감정을 설명했다. 2008년 폭행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씨가 금주를 하라고 했던 것에 대해서도 A씨는 "인간적으로 그게 맞나 싶었다"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A씨가 그로 인해 활동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나라당 당사 점거 투쟁에 따른 구속에 대비해 파기했던 사상학습 자료를 며칠 뒤에 이씨에게 다시 요구했고, USB(유에스비) 메모리로 받았다고 진술했다. 다시 자료를 요구한 이유에 대해선 이념서클 모임 대상자들에게 내려주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이씨와도 이듬해인 2010년 1월에 이 자료를 활용해 학습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바로 이 USB와 관련해 중요한 의문이 26일 공판 과정에서 제기된다. A씨는 USB를 2010년 3월께 잃어버렸고, 같은 해 10월말에서 11월께 등산복 바지주머니에서 다시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2013년 8월 작성한 수사보고서에 따르면 A씨가 USB를 분실했다고 주장한 기간 중인 2010년 8월 5일 오후 2시 20분부터 약 40분에 걸쳐 33건의 문서들의 암호가 마지막으로 풀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A씨는 변호인단의 지적에 "문건을 열어봤다면 제가 열어 본 것"이라며 "아마 8월경에 그것을 확인했을 것"이라고 진술을 번복했다.

A씨를 담당했던 국정원 수사관 문모씨도 진술을 역시 번복했다. 앞서 문씨는 2010년 10월이나 11월께 USB를 받았다고 진술했으나, 변호인단의 추궁에 "정확히 기억을 못하겠다"며 "그 전에 받았고, 포렌식을 한 것이 10월경이 아닐까 한다"고 답했다. 'USB의 암호를 풀 때 A씨가 비밀번호를 알려준 것인가, 아니면 국정원이 스스로 푼 것인가' 묻는 질문에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씨는 A씨로부터 USB를 제출받을 때 임의제출확인서와 압수조서를 작성했다고 밝혔으나 이 기록은 재판부에 제출되지 않았고, 해당 USB와 관련해서는 기소도 이뤄지지 않았다.

분실했다는 USB의 문건을 A씨가 열어봤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국정원이 열어봤을 가능성인데, 이 경우 국정원이 이를 미리 확보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A씨가 소지하고 있던 USB를 어떤 경위로든 국정원이 미리 확보했다면? 집행유예 기간 중에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가 덧씌워진다는 것은 A씨에게는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다. 따라서 국정원이 USB를 사전 입수한 뒤,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암호를 풀어 사상학습 문건을 확보해 A씨를 압박해 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문이 가능하다.

국정원이 A씨와 같은 대학 출신 선배이자, 직선 거리 200m 내외의 가까운 거리에 사는 문씨를 담당 수사관으로 배정한 것 역시 이 같은 심증을 더하는 부분이다. 국정원이 통상 연고 관계를 통해 대상자를 사업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대학 선배인 문씨가 A씨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회유하고 압박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A씨가 이 시기, 평소 불편한 사이로 알려진 사람에게도 금전적 지원을 부탁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국정원의 회유와 압박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A씨와 수사관 문씨는 처음 만난 시기가 2010년 7월이고 그 이전에는 전혀 몰랐으며, 회유나 압박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정원과 A씨는 인터넷과 전화를 통한 첫 제보 시점이 5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부분에서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A씨는 국정원 홈페이지에 신고를 하면서 전화번호만 기재하고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이메일은 남기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앞서 수사관 문씨는 A씨가 주민등록번호와 이메일도 남겼다고 증언했다. 이는 실제로 5월에 신고가 이뤄졌는지도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다.

A씨와 수사관 문씨는 8월 홍모씨가 A씨에게 연락해 왔고, 이에 A씨가 국정원 측에 녹음기를 달라고 자발적으로 요청해 녹음을 시도했으나 이듬해 1월까지는 녹음을 실패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통상 녹음기 작동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녹음에 실패한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동료들에 대한 인간적 감정이라든지, 아니면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라는 부담 등이다. 실제로 A씨는 집행유예가 풀린 시점인 2011년 1월 25일 첫 녹음에 성공해 이후 특별한 부담감 없이 녹취에 임했고, 수사관을 만날 때마다 최소 150여 차례 이상 10만~20만원씩의 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