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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환섭 화학섬유연맹 위원장 인터뷰

카알바람 2013. 3. 6. 12:08

신환섭 화학섬유연맹 위원장 인터뷰
“2013년, 다시 현장으로 가자!”
[0호] 2013년 03월 05일 (화) 홍미리 기자 gommiri@naver.com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이 신임위원장을 선출해 2013년을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노동과세계>가 신환섭 신임 위원장(49세)을 만나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에서부터 지금까지의 활동, 그리고 화학섬유연맹 투쟁사업장 현황 등에 대해 들어봤다. 신 위원장은 ‘다시 현장으로 가자’는 기치 하에 2013년을 새롭게 출발하겠다고 말한다. <편집자주>

 

△노조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 저는 영업 일을 하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1994년 당시 익산에 있는 한국안전유리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자동차유리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익산뿐만 아니라 인천 등 여러 공장이 있었는데 IMF 때 프랑스자본에 넘어가면서 회사 이름이 한국세큐리티로 바뀌었다.

인천공장은 한국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있었고, 익산공장에는 노조가 없었다. 인천공장은 이름은 노동조합이고 소위 유니온샵이라 회사에 들어가면 조합원이 됐지만 조합비를 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영업 일을 하다가 공장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안전유리에 입사하기 전에는 영업 일을 했고, 영업은 자신이 알아서 돌아다니며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공장에 들어가니 답답했다.
익산공장이 만들어진 초기 단계에서 인천공장에 있으며 노조민주화를 준비하던 한 선배를 만나게 됐다. 그 선배를 알기 전에는 노조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영업하러 다니는 길에 집회나 파업 때문에 길이 막히면 짜증도 나고 그랬다.

그 선배와 같은 동네에 살아 출퇴근을 같이 했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이나 그런 것을 주면서 읽으라고 하고, 나중에 퇴근 길에 그 내용을 물었다. 특히 사설은 꼭 읽으라고 했다. 퇴근 길에 집 근처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 잔씩 할 때도 읽은 게 어땠는지를 꼭 묻곤 했다.

자꾸 읽다보니까 새로운 분야인데다 재미도 있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그 전에는 먹고 살기 바빠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영업직은 성과제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공장에 들어가니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꼭 갇혀 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선배와 함께 읽고 대화를 하면서 사회를 보는 시각이 생겼다. 주말이나 일요일이면 그 선배가 우리 집에 와서 낚시를 가자고 했다. 낚시를 하고 있으면 형수가 큰 다라이에 밥이랑 술이랑 그런 것을 준비해다 줘서 먹었다. 고기 잡는 것은 뒷전이고 그걸 먹다보면 그 선배는 또 지난 번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토론을 벌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직사업이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그 선배가 자신이 인천에서 출마할 테니 나는 익산에서 노조를 만들어 노조를 바꾸자고 했다. 당시 제가 배우면서 눈을 뜨고 보니 노조가 어용이라서 회사에 붙어 조합원들 권익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을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준비하던 어느날, 겨울이었는데 그 선배가 출근 길에 차를 운전하다 눈길에 미끄러져 교통사고가 나서 돌아가셨다. 그 때 비록 노동조합은 없었지만 우리는 처음으로 조직적 집단행동을 했다.

우리는 그 선배 장례를 치르면서 영구차가 회사에 들어가 한 바퀴 돌고 다같이 노제도 지내려고 했다.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당시 회사 운영진이 기독교도였다. 그냥 기독교도가 아니라 회사 안에 교회까지 있었다. 군산공장에는 지금도 교회 건물이 있다고 한다.

기독교도 운영자들이 회사 안에 시신을 모셔놓고 장례를 치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강력히 막았다. 결국은 싸워서 회사에 들어갔고,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다 나오라고 해서 같이 노제도 지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장례를 치렀다. 그것이 조합원들을 모아내는 큰 계기가 됐다.

그 선배가 돌아가신 후 책임감을 느꼈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배를 만난 것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노조를 만들었고 제가 초대 지부장이 됐다. 처음 노조를 만들자 한국노총 전북지역본부가 같이 와서 활동하자고 했지만 우리는 거부하고 민주노총 참관사업장으로 들어갔다.

노조를 만들자마자 IMF 외환위기가 터졌고 구조조정 싸움이 시작됐다. 제가 일하던 익산공장은 금방 만들어진 새 공장이었기 때문에 구조조정 대상이 아니었고, 인천공장은 일이 많아도 회사가 구조조정을 해서 인원을 줄이고 싶어 했다. 인천공장 노동자들은 그걸 그냥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인천 다음은 익산 차례가 된다며 먼저 파업을 결의했다. 익산은 당시 98% 이상 찬성률이 나왔고, 인천은 30% 정도 찬성이었는데 그걸 평균 내니까 50% 이상이라서 파업을 하게 됐다.

인천과 익산이 같이 파업을 하다가 인천공장 위원장과 집행부가 우리 핑계를 대며 사퇴해 버렸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전에 불법파업을 모두 정리하라는 검찰과 정부의 압박을 못 견뎌 자신들이 모든 걸 책임지겠다면서 스스로 사퇴했다.

그 후 1998년 경 인천공장과 익산공장이 함께 상급단체를 민주노총으로 변경했다. 노조를 만들 때부터 조합 사무실 문제로 회사와 갈등이 있었다. 우리는 조합원들이 편히 오고 자주 모일 수 있는 곳에 사무실을 두고 싶었다. 회사는 사무공간에 노조 사무실을 두라고 했다.

우리는 식당 옆에 천막을 치고 거기가 조합 사무실이라고 했다. 결국 식당 건물 1층에 노조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이 2층에서 밥을 먹고 나서 1층에 있는 조합 사무실에 들러 편히 이야기도 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우리 힘으로 쟁취했다.

IMF 구조조정 싸움도 힘 있게 진행했다. 한국안전유리는 인천, 부산, 군산, 익산 등 여러 지역에 공장을 가진 그룹이었다. 매년 초 1월1일이면 호봉이 오르는데 회사가 어렵다면서 그걸 지급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유리계열사협의회를 만들어 연대투쟁을 조직했다. 투쟁이라곤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와 명동에 있는 본사에 가서 싸움도 하고, 계열사 사장과 간담회도 했다. 그렇게 투쟁하는 풍토를 만들고 성과도 냈다.

익산공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노총이었다. 익산공장에 민주노총이 생기니 여파가 컸고 회사는 노조를 깨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싸움이 오래 갔다. 회사는 2000년 경 당시 지부장인 저와 부지부장을 해고했다.

우리가 해고되자 현장싸움으로 번졌다. 회사는 관리자를 동원해 정문을 막아 해고자들 출입을 막았다. 이 소식을 들은 조합원들이 조퇴투쟁을 시작했다. 3교대였는데 다음 교대조가 들어와 앞서 조퇴를 했다고 하니까 잇따라 조퇴를 또 해버렸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라인이 섰고, 파업이 시작됐다. 대략 1주일 이상 파업을 한 것 같다.

그러자 회사는 징계를 시작했다.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불법파업 운운하며 협박성 징계를 남발했다. 조합원 200여 명 중 150여 명 이상이 정직 등 징계를 받았고, 핵심간부 5명이 또 해고됐다. 손배도 있었다.

조합원들은 하나같이 개별 사유로 조퇴를 했다고 말했다. 조합이 시켜서 조퇴를 했다고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회사가 하다하다 안되니까 조합원 개인에게 1인당 1천수백만원씩 손배를 청구했다.

노조나 지부장에게 손배를 청구하면 또 모르는데 개별 조합원들에게 그런 부담을 준 것은 현장을 교란시키려는 것이었다. 현장 조합원들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돈이 좀 있는 사람은 그 돈 내버리고 말자고도 하고, 낼 돈이 어디 있느냐고 끝까지 가보자고도 했다. 그래도 지혜롭게 잘 모아낸 것 같다.

회사는 용역깡패를 고용해 6개월 이상 공장에 상주시켰다. 숙식을 제공하며 조합원들과 싸움을 하게 만들었다. 매일같이 용역깡패와 회사 관리자들이 편을 먹고, 노동자들과 치고 받고 싸웠다.

치고 받고 하는 와중에 공장 안에 있는 가장 높은 기계 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리가 정당하다고 외치고, 회사 측 관리자는 그걸 끌어내리려고 하고, 난장판 싸움을 했다. 그렇게 6개월을 싸우니까 용역깡패들이 변했다. 우리 편이 돼 버린 것이다. 우리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니까 회사가 나쁜 놈들이라고 걸 알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우리가 출근할 때 용역깡패들이 먼저 인사를 하곤 했다.

용역깡패도 요즘과는 달랐던 것 같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 같이 먹고 자면서 치고 받고, 지역에서 아는 사람과 연결도 되고 하니까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끈질기게 싸운 끝에 회사가 백기를 들었다. 그동안의 징계를 모두 무효화하고 지급하지 않은 돈을 지급했다. 회사 관리자 일부가 이게 뭐냐면서 이렇게 하면 회사 규율이 안 선다고 항의할 정도였다.

노동조합 입장에서는 완벽한 승리였다. 1년, 6개월 등 정직처분을 받고 집회를 하고 현장투쟁을 한 1년 정도의 기간 만큼 임금을 받았다. 파업 기간 현장에서 일한 사람들은 억울하다고 했다. 투쟁하고 나서 3년 여를 싸웠으며 승리로 종결된 것이 2003년 경의 일이다.

그 후 노조는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회사가 어려워져서 단협을 통해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비롯해 우리가 원하는 사업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노조가 파업을 자꾸 하니까 완성차 등 납품에 문제가 생겨 생산물량이 줄고 일거리도 줄었다.

저는 6년 간 지부장을 하고 화학섬유연맹 전북지역본부장으로 파견 나왔다. 제가 나오면서 새 지도부를 선출해야 했다. 그때까지 해고자 문제는 해결이 안됐고 회사는 해고자가 노조 상근을 하면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노조가 ‘도 아니면 모’ 식으로 강수를 뒀다. 익산공장 해고자 2인이 지부장, 부지부장에 출마해 압도적 찬성률로 당선이 되자, 회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저는 노동자 통일선봉대 활동도 했다. 초대 지역통선대장을 하면서 익산CC 등 악질자본에 맞서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도 서너 곳 해결했다. 화학섬유연맹 전북지역본부장과 화학섬유노조 위원장 등을 거쳐 올해 초 연맹 위원장에 당선됐다.

 

△화학섬유연맹 조직현황과 산별노조 건설을 비롯한 당면 현안에 대해 = 우리 연맹은 한 때 3만명 이상 규모였으나 지금은 1만5천명 정도다. 화학섬유노조 반, 화학섬유연맹 반이다. 사업장 수는 산별노조로 전환한 쪽이 훨씬 많지만, LG화학과 같이 규모가 큰 사업장이 연맹에 남아있다.

민주노총과 함께 산별전환을 목표로 삼아 추진한 곳들은 이미 오래 전 산별로 가서 10여 년이 넘었다. 연맹 내 사업장들이 집행부 의지에 따라 산별 필요성을 느끼면 전환투표를 붙이고 현장을 발동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안타깝게도 안 된다. 회사는 복수노조 등 대응논리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투본과 연맹과 노조가 함께 운영한다. 저는 집행부 의지에 달렸다고 본다. 기업별노조에 고착돼선 안 된다. 요즘 현장과 소통하려고 가능하면 현장을 많이 찾아다닌다.

제가 화학섬유연맹 전북지역본부장 때 투쟁하던 노동자들이 아직도 계속 투쟁하고 있다. 한솔홈데코, LG생명과학, 동양실리콘에 노조를 만들었다. 천막을 세 군데씩 치고 집에도 못가고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난다. 동양실리콘은 경총 회장 사업장이다. 노조를 만들어 장기 투쟁을 했는데, 결국 회사가 폐업을 하고 공장을 없애 버렸다.

회사가 민주노총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산별노조를 인정 못하겠다고 했다. 한국노총으로 가면 다 들어준다고 했다. 1년6개월 전면파업을 하며 싸웠다. 조직적 논의 끝에 일단 한국노총으로 옮겨 노조를 살리자는 제안도 나왔는데, 당사자들이 그렇게는 못한다고, 차라리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어도 산별노조를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천막농성을 오랫동안 하면서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그런 결정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왜 노동조합을 하는지 느끼는 경험이었다. 투쟁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한솔홈데코도 5년 가까이 싸웠다. 잘 싸워왔고 지금도 잘 싸우고 있다. 회사가 노조를 인정하던 안하던 상관없이 투쟁하겠다는 것이다. LG생명과학도 5년 차 모범사업장이다. 대림산업도 4년 여를 싸웠고, 아데카코리아도 장기투쟁사업장이다.

 

△민주노조는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 민주노총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 민주노조는 제 경험으로 미뤄보면 자기 뿌리를 알게 되는 것이며, 자기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노동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버티며 투쟁하는 것이 힘들지만 이기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제가 파견나온 후 투쟁사업장 조합원들과 같이 먹고 자고 한 세월이 얼마인지 모른다. 앞이 조금만 보여도 그들 모두에게 희망이 된다. 민주노조를 가진 사람들은 잘 모를지 모르나 그것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은 그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다.

내가 속한 노동조합의 소중함을 모르면 깨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몰라서 못하면 배우면 되지만, 알면서도 못하는 것은 희망을 버리고 절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저는 현장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연맹 2013년 사업계획의 기조는 ‘다시 현장으로 가자’다. 소통하는 투쟁은 5년이고 10년이고 간다. 상대방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평가만 하는 평가자들이 돼 버렸다. 현장이 그걸 더 잘 안다. 그걸 아니까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결정과 집행이 따로 가는 것이 큰 문제다.

현장 조합원들과의 소통의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중앙과 지역 간부들 간에 소통이 잘 안 되면 현장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시간이 걸리고 더디게 가더라도 그것을 우리 사업에 핵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가진 고질적 문제라고 본다. 자기 것을 내놓고 양보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양보하고 의견을 좁혀야 한다. 민주노총 지역본부와 산별조직이 씨줄과 날줄이라고 할 때 회의에서 같은 결정을 해도 집행이 다르면 조합원들은 큰 혼란을 겪는다.

명분과 당위성만 갖고 집행하지 못할 것까지 결정을 한다. 그런 결정을 안 하면 욕을 먹으니 못할 결정을 해놓고 그냥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온 그런 방식이 과연 맞는지 물어봐야 한다. 결정을 달리 해서 욕을 먹으나, 집행을 제대로 못해서 욕을 먹으나, 어차피 욕 먹는 것은 마찬가지다.

혁신하자고 말만 할 게 아니다. 큰 틀에서 민주노총 혁신을 말로만 해선 안 된다.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는 우리 내부의 문제가 바로 그런 거다. 그럴수록 조합원들의 실망과 좌절감은 더 크다. 더디게 가도 차근차근 가면 좋겠다.

얼마 전에 현장을 돌면서도 뼈저리게 느꼈다. 간부들이 아무리 바빠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는 건데 그 역할을 제대로 못 찾는다. 그러니까 현장은 혼란스럽다. 자기 자신만 바쁘다. 현장 조합원들에게 일관되게 전달하지 못하니 현장 조합원들은 소외된다.

간부와 지역 상근자들이 현장을 복원해야 한다. 중앙은 그들과 소통하면서 현장을 챙겨내야 한다. 저는 형식적인 회의나 절차보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민주노총 간부라는 직책이 자랑스러울 것이며, 사업이 잘 돼야 나도 내세워지는 것이다.

회의에 참석도 안 한다. 늘 성원이 될까 고민할 정도다. (민주노총이라는) 이름과 내부 실체가 별개로 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대화도 되고 마음도 모아질 것이라고 본다.

우리 연맹은 이번 중앙위원회를 열 때 21명 중앙위원 중 19명이 참석했다. 대의원대회도 150명 중 120명이 왔고, 못 온 사람들은 앞서 불참 이유를 밝혔다. 대회 전에 현장으로 돌면서 의견을 듣고 많은 것을 반영했으며 소통하려고 노력한 결과다.

우리는 내부 본질적 문제를 너무 안 드러내려고 한다. 자기 주장은 중요하지 않다. 현장 조합원들을 팔아먹는 활동가는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된다. 자기 생각이 현장의 생각인양, 자기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원칙적인 것만 주장하는 유명무실한 조직이 돼 버렸다. 현장이 괴리됐음을 경험으로 느꼈어도 자기 탓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중사업을 한다면서 대중을 고립시키고 자기 것만 주장하니 민주노총이 내부 싸움만 하다 망할 판이다.

우리 만큼은 그러지 말자고 중앙위와 대의원대회에서 말했다. 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100을 할 수 있고 더 힘을 쏟으면 150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죽기살기로 노력해서 목표를 채워나가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인 것이다.

민주노총의 옛날논리와 당위성, 그런 것은 역사 속에서 존중돼야 마땅하나, 조합원들이 어떤지, 현장상황이 어떤지를 읽지 못하면 상층만의 말잔치로 끝나고 그 와중에 현장은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은 2013년을 어떻게 출발해야 할까? = 대선을 앞두고 기대심리가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서서 확실히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현장에서 민주노조를 만들고 싸우는 데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와 매치될 수밖에 없고, 정말 그렇다면 그나마 다져온 민주주의마저 퇴보하게 될 것이다. 인권탄압이 광범위하게 이뤄질 것이다.

자기 말을 잘 들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박정희가 어떻게 하는지를 그런 과정을 다 본 박근혜다. 지금도 똑같지 않은가.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간다. 대변인 임명도 그렇고. 현 정부에 대해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일말의 가치도 없는 일이다.

우리 화섬 조합원들을 비롯해 민주노총 조합원 전체가 그런 본질을 피부로 느낄 날이 멀지 않았다. 노동의제는 우리 사회에서 지지를 얻기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자본은 현장에서 더 과감하게 공격해 들어올 것이다.

우리는 현장을 명확히 진단하고 민주노조에 같이 참여하고 지켜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고 할게 아니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민주노총이 되고,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으로 좌시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내 옆 사람도 안할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 밖에 안 된다.

현장에서부터 민주노총의 현재를 명확히 진단하고 현장을 잘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조합원들 관심을 이끌어내고 조합원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2013년을 관통해야 할 우리 과제는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가진 자들을 위해 자기 입장을 드러내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한다. 큰 틀의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가 상대적으로 잘 못해 온 일이다. 백날 욕해도 바뀌지 않으면 우리 입만 아프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면 국민 50% 이상이 우리 편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잘 진단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필요한 일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저는 연맹 위원장 임기 내 이루고 싶은 게 있다. 신규노조 매뉴얼을 만들고 싶다. 지역상근자들은 노동조합 건설 관련 상담이 들어오면 초기 상담에서부터 노조를 안착시킬 때까지의 방법이 있는데 이게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자본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겠지만 큰 골격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정형화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는데 노동조합들은 옛날 이야기만 하고 있다. 신규노조 상담이 많이 들어왔는데 잘 안되고 다 깨졌다.

 

신규노조를 처음 만들 때부터 서로 소통하고 지도하며 잘 이끌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경험 많은 이들의 지혜도 필요하고 변화하는 시대에도 잘 조응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반드시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본다.

 

최근 몇 년 간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자본은 단일한 방식으로 노동조합을 치고 들어온다. 노동부 지도도 단일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도가 단일하지 못하다. 가장 큰 적이 바로 활동가들이다.

 

준비된 이들이 다치지 않고 노동조합을 건설할 수 있도록 조심해서 지도하고 있는데 다른 활동가가 와서 "이게 뭐냐? 그렇게 하면 안된다"며 흐트려 놓기 일쑤다. 이는 결국 조직을 분열시키는 양상으로 간다.

 

옛날에는 투쟁만 하면 다 이기는 싸움이었다. 요즘은 반대다. 투쟁을 하면 거의가 장기투쟁사업장이 된다. 우리가 투쟁을 승리하고 희망을 만들려면 어떤 방식으로 현장투쟁을 지도하고 이끌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저는 지금 이 시기에 신규노조 매뉴얼을 만들어 노동조합 조직을 강화하고 확대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임기 내 이 작업을 꼭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