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업무상 질병 입증책임을 피해근로자가 아니라 근로복지공단과 사업주에게 부과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거부했다. 대신 근로복지공단의 조사역량을 강화하고 업무상 질병 인정범위를 확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4일 인권위에 따르면 노동부는 최근 이러한 답변을 담은 의견서를 인권위에 전달했다. 노동부가 거부한 업무상 질병 입증책임 배분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과 맞물려 이슈로 떠오른 문제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다수 발생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산재승인을 거부했고, 업무와의 연관성을 입증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은 재판에서 번번이 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현행법은 피해노동자에게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의학적인 연관성을 밝힐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인권위는 이에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첨단 전자제조업이 발전하면서 산재입증이 쉽지 않고, 노동인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산재보상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질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를 피해근로자가 아닌 상대방이 증명하도록 산업재해보상보험 법령을 개정하라"고 지난 5월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또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을 정기적으로 추가·보완하고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독립성·공정성·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노동부는 업무상 질병 인정범위 확대와 질병판정위 전문성 강화는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고 답했다. 반면 입증책임에 대해서는 "업무관련성을 밝히기 어려운 질병에 무분별한 보상과 과도한 재정지출이 우려돼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문기섭 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관은 "입증책임을 공단에 부과한다면 의학적인 연관성이 명백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도 모두 보상금을 지급해야 해 보험기금 재정을 어렵게 할 것"이라며 "공단의 조사역량을 강화하고 업무상 질병 인정범위를 넓혀 피해근로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피해근로자들이 고도의 전문성과 시간·비용을 요구하는 의학적 인과관계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며 "이와 관련된 더 많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