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
조봉암 진보당 사건은 '법살', 2012년 진보당 사태는… 본문
조봉암 진보당 사건은 '법살', 2012년 진보당 사태는…
[기자수첩] 통합진보당 사망선고 한 탈당파와 '진보언론', 왜 사과 한마디 없나
문형구 기자 munhyungu@daum.net
입력 2012-11-20 11:22:49 수정 2012-11-21 09:15:17
흔히 인용되는 병법에 차도살인(借刀殺人)이란 게 있다. 남의 칼로 적을 제거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적진을 분열시켜 상대를 제압하는 전술이다. 예나 지금이나, 힘에만 의지하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일 뿐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첫번째 '진보당' 역시도, 내부의 배신이 아니었더라면 한국정치사의 큰 줄기로 남았을지 모를 일이다.
1958년 진보당(창준위) 내부에서 휘둘러진 '칼'은, 당내 주류였던 조봉암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서상일계의 배신이었다. 서상일은 원래 한민당-민국당 출신의 보수파 중진으로, 반이승만 세력의 결집과정에서 진보세력으로 배를 갈아탄 인물이었다. 조봉암 보다 10여년 연배가 많았던 서상일은 민중들에겐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지만, 1인자를 향한 야심만은 만만치 않았다.
ⓒ자료사진
진보당 사건 재판 당시의 죽산 조봉암 선생
진보당 사건의 피고인이자 진보당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고 정태영 교수는 "진보당의 확대 강화 운동이라는 명분으로 출발한 '진보세력 대동 추진운동'이 '혁신민주세력 대동'으로 변질하더니 마침내 '진보당 말살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서상일과 그 추종자들은 진보당 내부에서의 쿠데타에 실패하자, 진보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곧 '민주혁신당' 창당에 나선다. 그러나 조봉암이 꿈 꾼 진보정당이 '피해대중'의 정치적 대표체였던 것과 달리, 서상일이 추구했던 진보정당은 다만 이름뿐인 진보정당이었다. 결국 서상일의 행태는 진보당을 결정적으로 고립시켰고, 종국엔 진보정당의 명맥을 끊어놓는 데 일조하게 된다. 민주혁신당이 걸어갈 분열과 이합집산, 그리고 소멸의 길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진보당 모살(謀殺)의 올가미
강화군에서 3.1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조봉암은 불과 20세의 청년이었다. 40년 후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조봉암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했는지 모른다. 험악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신에게 망명을 권한 박진목에게 조봉암은 "동지들은 이런 처지에 버려두고 나만 살겠다고 그 궁색한 망명을 할 수 있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조봉암이 망명을 등지고 선택한 길은,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과 한국사회 첫 진보정당의 '최후'가 됐다. 그는 4.19혁명을 불과 8개월여 앞둔 1959년 7월 31일 사형 집행을 당한다.
서상일과 혁신세력들은 '진보당 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내놓는다. 곧 "진보당은 좌경 사회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혁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나 진보당에 비해선 우경화한 정당이다" "그들(진보당)이 평화통일을 이룬 후 노동자, 농민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하기 위해 공산당과 합작 내지 같은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래의 일이므로 나는 모르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같은 증언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과거의 정치적 동지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진보당 바깥으로 자리했던 미 정보당국과 이승만의 '의도' 뿐 아니라, 진보당 내부의 혁신계, 그들의 권력욕과 공명심, 당권파에 대한 시기, 매카시즘에 대한 두려움 등이 뒤엉켜 진보당 모살(謀殺)의 올가미가 됐다는 사실이다. 2012년 현재, 1958년의 진보당 사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지점이다.
진보당에 대한 '증언', 통합진보당에 대한 '고발'
조봉암의 진보당이 수권을 내다본 첫번째 진보정당이었다면, 통합진보당은 한국전쟁 이후 명실상부한 '제3당'이 된 두번째 진보정당이었다.
서상일계가 주도했던 일개 협의체인 '혁신대동추진위원회'가 조봉암의 백의종군과 진보당 추진위 백지화를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통합진보당의 '조준호진상조사위원회'는 허위사실로 가득찬 진상조사 발표를 통해 당권파의 2선후퇴를 요구했다.
통합진보당의 경선부정은 혁신계 인사들이 저질렀지만, 이를 은폐한 혁신계는 자신들의 당내 경쟁자인 당권파에게 그 책임을 요구했다. 58년 진보당의 2인자 '서상일'과 마찬가지로, 혁신계는 2012년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서상일과 같은 방식의 '증언'도 이뤄졌다. 서상일이 진보당 사건 재판에서 "좌경 사회주의" "공산당과의 합작"을 증언했듯이, 유시민 전 대표는 언론에 "민노당에 지하 지도부가 있었던 게 아닌지 의문"이라 발표했고, 혁신계의 또다른 지도자인 심상정 의원 역시 "보이지 않는 조직" "비가시적인, 일종의 지하정부"를 주장하고 나섰다.
2012년에 빚어진 통합진보당 사태는, 지금까지만 보면 58년 진보당 사건의 '역할극'에 다름 아니다. 진보-개혁세력의 야권연대를 주도했던 당권파를 주시해 온 우익진영을 대신해, 통합진보당 내부에서 칼을 휘둘러 준 것이 이들 혁신계인 셈이다. 첫번째 사건은 잘 알려진대로, 조봉암의 사형과 진보당 강제해산으로 막을 내렸다. 두번째 사건의 결과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조봉암 진보당 사건은 '법견', 2012년 진보당 사태는…
최근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나오면서, 통합진보당 사태를 재조명하자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트위터와 블로그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소셜테이너' 김여진 씨나, 내일신문에 칼럼을 쓴 희망제작소의 윤석인 대표 등이다. 그동안 언론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또한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기에 더욱 주목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수개월 전에, 컴퓨터 법의학 전문가인 김인성 교수가 '통합진보당 내의 경선부정은 혁신계가 저지른 불법행위 뿐'이라는 조사 결과를 냈을때도 언론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사태가 '선수와 감독이 한 편이 돼 벌인 편파판정극'이라는 게 검찰수사에서까지 드러나자, (이름만)진보·보수 언론의 담합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 요구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6개월간 지속된 종북소동과 마녀사냥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검찰 발표 때문이라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이는 진영논리에만 능하고 사실관계에 무관심한 우리 언론지형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은 흔히 '법살(法殺)'로 불린다. 물론 이 사법살인은, 도처에서 그 증거가 발견되듯이 미 정보당국과 이승만 정권의 의도 하에 진행된 작품이었지만,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이 사법부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두고도, 누군가는 '법견(法犬)들에 의한 법살'이라고 했다.
어디 법견 뿐이었을까. 위의 두 사건 모두에서 언론, 특히 후자의 경우에서 자칭 진보언론들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바 있다. 2012년의 통합진보당 사태를 다룬 그들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진보언론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다는 이유로, 허위폭로전을 감행하고 피해자 행세를 한 혁신계와 조준호 진상조사위를 띄워주기에 바빴고, 분당 이후엔 '통합진보당'의 고립에 의한 자진해산이라는 보수세력의 노림수에 기꺼이 동조해왔다. 이들 언론들은 통합진보당에 의한 사망선고를 공공연히 내려놓고도, 혁신계의 뺑소니가 밝혀진 지금은 침묵하고 있다. 조봉암 법살에 공모했고, 또한 침묵해 온 '법견'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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