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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사태’ 정면돌파해 ‘화순정치 새바람’ 일으킨 윤석현 본문
‘진보당사태’ 정면돌파해 ‘화순정치 새바람’ 일으킨 윤석현
[인터뷰] 12.19보궐선거 당선 윤석현 통합진보당 화순군의원
김주형 기자 kjh@vop.co.kr
입력 2012-12-25 15:57:51 수정 2012-12-26 00:06:37
ⓒ민중의소리
윤석현 당선자가 19일 오후 10시를 넘어 선관위로부터 당선증을 받아서 돌아와 다시 한 번 당원, 지지자들 앞에서 당선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윤 의원은 12.19 화순군의원 보궐선거에서 43.72% 10,394표를 얻어 43.20%(10,035표)를 얻은 정철진 민주당 후보를 359표 차이로 제치고 당선됐다. 그 뒤를 박태희 무소속 후보가 14.06%(3,345표)를 얻었다. 화순군의원 보궐선거에는 총유권자 30,963명 가운데 24,324명이 참여해 투표율 78.56%를 기록했다.
이번 선거는 민주당과 경쟁구도도 중요했지만, 관건은 당 내부에 있었다. 2010년 지방선거, 2011년 4.27재보궐선거 화순군수 재선거, 올해 4.11총선과 후보 사퇴를 거치면서 선거 피로감이 큰 가운데 지난 5월 진보당 사태까지 겹쳐 당원들의 자신감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윤 의원의 당선 전까지 화순지역에서 민주당의 벽을 넘은 적이 없었다는 심리적 장벽이었다. 사실 진보당 당원들은 선거 직전까지 ‘될 수 있겠나’ ‘민주당을 넘을 수 있을까’라는 심리적 압박감을 가졌다고 한다. 여론조사 결과와 지인들이 당선예감 소식을 전했을 때도 이같은 상황은 계속된 것이다.
ⓒ민중의소리
19일 오후 9시 40분께 개표현장에서 윤석현 후보의 당선이 확정적이라는 연락을 받고 윤 후보와 당원, 지지자들이 "윤석현!"을 연호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당선까지 이어질 수 있었는지, 선거운동은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24일 오후 화순군의회 사무실에서 윤 의원과 선거캠프 관계자를 찾아갔다.
윤 의원은 자기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다 IMF로 부도를 맞아 실직한 뒤 PC방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었다. 2004년 즈음 화순으로 가족이 이사를 하며 친구의 투병으로 온전히 맡게된 독서실을 운영하게 됐다. 이때 청년회 활동을 시작하고, 2005년부터 당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윤 의원은 이미 2차례나 낙선한 경험이 있었다. 윤 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후보사퇴 후 내부적으로 힘들었고 당이 정상화되기 어려웠다. 또 전당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선거를 통해 돌파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지역위원장을 맡고 후보로 나설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보궐선거 당선에 대해 “지난 4년여 겪었던 인간관계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서 “또 중반 이후 ‘이정희 효과’도 분명히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의 공천과정에 대한 문제도 당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윤 의원은 “초기 민주당 공천과정에서 그동안 화순정치의 골치거리였던 부부군수(임호경·이영남)·형제군수(전형준·전완준)의 줄세우기·편가르기를 재탕했다. 본 선거 닥칠 때까지 질질 끌어왔다”며 이때 먼저 선거를 주도한 것이 초반 판세를 유리하게 끌고 간 것이라 평가했다.
ⓒ민중의소리
이 전 후보가 17일 오후 6시 전남 화순군 화순읍 국민은행 사거리에서 윤석현 후보 지원유세를 하고 있다.
인지도는 좀 쌍은 상태였지만, 민주당이 공천한 후보가 당사태와 진보당을 탈당한 정철진 후보라는 점이 걸렸다. 실제 정 후보는 선거중반 화순지역신문협의회가 주관한 토론에서 ‘당 분열’ ‘공천비리’ 등으로 탈당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보당 사태 문제로 크게 시비가 붙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 후보쪽이 대선 쪽으로만 관심이 쏠려 선거운동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민주당 대 진보당으로 치러질 선거구도였는데, 후보등록 마지막날 박태희 후보가 무소속으로 등록해 변수로 등장했다. 민주당 세력재편에서 밀려난 세력이 박 후보는 지원해주고 있어 실제로는 민주당 후보 2명과 경쟁해야 하는 구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선거운동기간 4차례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2번째 여론조사에서만 오차범위 안인 1% 차이로 뒤지는 결과가 나왔고, 모두 앞선 결과를 내놨다. 하지만 모두 오차범위 안인 5~7% 사이였으며, 30%를 넘는 부동층이 관건이었다.
윤 의원의 선본에서는 단순 지지도보다는 당선가능성에 더 주목했다. 3~4번째 여론조사에서는 당선가능성이 오차범위를 넘는 차이로 앞섰다. 하지만 이 역시 부동층과 민주당의 벽이라는 심리적 압박감을 완전히 씻어줄 순 없었다.
선거운동 초반 주도권을 쥔 것이 당선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 많았다. 또 중반 이후에는 ‘이정희 효과’와 함께 광주 광역·기초의원들과 당원들이 적극 합류하며 판세를 유리하게 끌고갔다고 평가됐다.
윤 의원은 “선거 초중반 광주에서 시·구의원, 당원들이 결합해 헌신적으로 싸워줬다. 이에 대한 지역주민들이 많이 공감했다”면서 “여기에 이정희 후보의 TV토론회, 홍이식 군수의 구속이 더해지며 ‘더이상 안되겠다’ ‘바꿔야 되겠다’는 메시지를 계속던졌다”고 강조했다.
ⓒ민중의소리
이 전 후보가 윤석현 전남 화순군의원 후보(왼쪽), 문홍 광주 동구의원 후보와 함께 민족민주열사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그 뒤로 '진보적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라는 진보당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선거운동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윤 의원은 “상대적으로 나머지 후보들이 소홀했다. 혈연·지연·학연 등에 얽매어 성실하지 않았다”면서 “우리는 새마을단체, 읍사무소에서 김장봉사를 헌신적으로 했고, 눈오면 장터에서 눈을 치웠다. 광주 시·구의원들이 매일 찾아가 경로당을 치우고 설겆이를 하고, 이런 노력들 때문에 정말 어렵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돌아선 것 같다”고 분석했다.
또한 “선거 종반에는 민주당 내 반대세력이 무소속인 박 후보를 돕다가 ‘될 사람 돕자’고 넘어왔다. 이런 정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면서 “분명한 건 주민들이 부부군수·형제군수 같은 지역연고와 줄서기 정치는 더 이상 안된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라 강조했다.
윤 의원은 직접 주민들을 만나면서 20~40대 젊은 유권자에게는 ‘대안세력론’으로 파고들었고, 자연부락과 같은 시골에서는 ‘읍소전략’을 폈다고 했다.
끝으로 윤 의원은 기숙형 공립고인 화순고등학교에서 365일 쉬지 못하고 일하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주일에 1번은 쉴 수 있도록 하고, 청소노동자들의 근무여건 개선 등 특색있는 활동과 대민접촉 확대 등에 나설 것이라며 “의정활동은 소신껏 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며 의정활동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화순군의회는 10명의 군의원 가운데 7명이 민주당 소속, 무소속 2명, 윤석현 진보당 의원으로 구성돼, 윤 의원 혼자 책임있는 정책을 관철하거나 집행부나 의회의 민주당의 전횡을 견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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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현 후보가 후보 등록 뒤인 지난달 28일 화순읍장날 주민들과 반갑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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